본문 바로가기

'서귀포시 남원읍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때 묻지 않은 아름다운 해안절경과 문화와 낭만으로 채색된 남원읍사무소 홈페이지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우리 남원읍은 봄철 체험 최대의 관광축제인 고사리축제가 매년 열리고, 귤림추색(귤이 익어가는 가을풍경)이 특히 빼어난 감귤의 명산지로 따뜻한 기후, 정감이 새록새록 솟아나는 훈훈한 인심으로 제주도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고장입니다.
「변화의 새물결, 도약하는 남원읍」만들기에 앞장서서 끊임없이 노력하며 정진하는 남원읍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우리읍홈페이지에 자주 방문하셔서 많은 관심과 사랑을 베풀어 주시기 바라며 방문하는 모든 분들의 꿈과 희망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합니다.

 

남원리 : 남원1리, 남원2리<남원리 : 남원1리, 남원2리>

남원 1리

본 부락의 설촌은 고려 초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당시 정착하였다는 구전이 오늘까지 전래되고 있지만 문헌의 기록이나 그 실증은 확실한 근거가 없으나 단, 서의동 지역에 다수의 방묘(고분)가 발견되어 이를 뒷받침하여 주고 있다. 따라서 이 시대를 본 부락의 초기시대라 한다. 그 후 본 부락은 고려 말기에 와서 집성촌을 이루었으니 조선시대까지를 본 부락의 중세 시대라 할 수 있다. 서기 1200-1290년 경 조씨, 한씨에 의하여 설촌 되었다는 구체적인 설화가 있으며 한씨가 정착한 "한덜래(벌단)"라는 지역명칭도 모두가 이를 실증 해준다. 이 시대를 분기점으로 하여 이후 100여년이 지난 뒤(3대 정착) 공민왕 23년(1375년)에 최영장군에 의하여 당시 100여년 제주를 지배하여 온 몽고의 목호군 정벌시에 본 부락의 서의동 서북쪽 삼도 휘하의 부락명을 석곡리라는 명칭이 사용된 것이다. 당시 주민들이 풍수지리설에 입각하여 서의동 북쪽 기슭에 팽나무를 식재한 것이 현재 수령 500년 이상 된 것으로 추정한다. 남원 2리 서의동과 한남리 경계지점인 석곡리가 설촌터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 근거로는 고려말 정씨, 한씨등이 집성촌을 이루었을 당시 석곡리에 정씨 부인이 있었는데 남편이 몽고의 난에서 전사하여 자식없이 수절하였는데 어느날 위협을 당하자 자결하여 정절을 지키니 관가에서 열녀비를 세워주었는데 여기에 석곡리라는 마을명이 새겨져 있다. 이와같은 상황으로 볼 때 본 부락 석곡리는 다세대가 모여사는 집성촌인 것이다. 고려 시대라 할지라도 귀향민 들로 인하여 구성되었으니 씨족적 집성의 특징을 볼 수 있다. 한씨와 조씨는 서부지역에서 이주하여온 사람들로서 3대가 지난후 서부지역으로 귀환하였다. 따라서 지금의 그 근거는 한씨의 묘가 서의동에 있는 점으로 보아 이를 설명하여 준다. 현재 주요 구성원이 되는 정씨, 한씨 등이 이 시대에 정착한 것이라 단정 할 수 있으니 이 때가 1370년경이다. 정씨, 한씨는 제주목에서 제주동부지역을 따라 이 곳에 정착하여 중세 중심씨족이 된다. 그후 오씨, 김씨등도 동부지역에서 이주하여 와서 집성촌인 세대구성원이 되었다. 본 마을의 근세 시대는 태종 2년(1402) 도주 관 제도가 실시되면서 태조 16년에 와서 제주목, 정의현, 대정현 등 행정구역 편제로 인하여 행정적 지배와 교육적 영향을 받았으니 행정 단위의 마을이 된 것이다. 이후 석곡리는 남원읍의 전신인 서종면 서의리로 개칭되었고, 그후 1935년 4월부터 남원면으로 개칭되면서 남원 1,2 구로 구분되었다. 남원면 의회가 구성되고 구가리로 개칭되어서 1구는 현재 남원 2리로 되고, 2구는 현재 남원 1리로 개칭되어 1980년 1월 남원읍으로 승격되어 행정, 문화, 교통의 중심지로 발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남원1리 홈페이지 바로가기

 

남원 2리

서기 1200-1290년경 조씨, 한씨에 의하여 설촌되었다는 구체적인 설화로 조씨가 정착한 터전이 현재까지 '조이왓' 이라는 택호가 있으며, 한씨가 정착한 곳은 [한덜래(벌판)]라는 지역으로 불리고 있다. 공민왕 23년(1374년)에 최영장군에 의해 본 부락의 서의동, 서북쪽 삼도도통사 휘하의 부락이 석곡리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다. 한씨의 묘가 있는 서의동에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으며, 현재 주요 구성원이 되는 현씨, 정씨, 송씨, 한씨 등이 1370년경 정착하였고 그후 오씨, 김씨등이 동부지역에서 이주하여 다세대 구성원이 되었으며, 설촌 이후 지금까지 마을안녕과 번영을 기원하기 위하여 천제인 포제를 오늘에 이르기까지 지내고 있다.

 

남원2리 홈페이지 바로가기

 

태흥리 : 태흥1리, 태흥2리, 태흥3리

태흥 1리

지금부터 약 700여년 전부터 본리 1596번지를 비롯한 속칭 소서물 근처(묵은 가름)를 중심으로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다고 하나, 그에 대한 기록이 없고, 다만 옛날의 패총들이 있을 뿐이며, 본리 1569번지를 절터왓, 1580번지의 장수 무덤, 또는 군 마루에 대한 이야기가 전설로 전해 내려오고 있으며, 송포 팔경이라 불리우는 자연경관이 마을을 에워쌌다는 전설도 있다. 기록에 의하면 서기 1662년경에 진주 강씨 등이 거주하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이루어졌으며, 이때부터 지명을 "폴개"라 불리었다. 그러다가 1402년(태종2년)에 정의군 서중면이라 하여 의귀리에 면치소를 두면서 본리를 벌포리라 불리었으며 그후 1897년(광무2년)에는 보한리라 개칭되었다가 1902년에 태흥리로 변경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태흥리 리정 발전 과정을 살펴보면 이조 22대왕(정조)때부터 김영태씨를 리정 1대로해서 리정 3대와 경민장 김웅환부터 18대까지 리정을 운영하여 왔으며, 이조 26대왕(고종)때부터는 또다시 구장 김봉수를 1대로 7대까지 총 28대에 이르러 리정을 운영하다가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다. 서기 1925년부터 태흥 1, 2구로 분리시켰다가 1950.8.25일 태흥리로 합리(合里)시켜 생활하였으나 마을이 커지고 생활권이 달라짐에 따라 행정구역도 1953.9.30일 태흥 1,2,3리로 분리하였으나 1961.4.8 동년 4.21일까지 다시 합리되었다가 1961.8.1부터 다시 태흥 1.2.3리로 분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태흥1리 홈페이지 바로가기

 

태흥 2리

태흥마을은 지형이 비교적 광활하고 기온이 온화하며 해안지대를 넓게 끼고있어서 예부터 '폴개'라 불렀다. '묵은 가름'이란 곳에 인가가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고 보면 이곳 태흥리에는 고려말경에서부터 부락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해안가에서 멀리 떨어진 '묵은 가름'보다 해안을 가까이 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한 사람들은 포구가 많고 소금밭이 가까우며 해산물이 풍부한 해안가로 이주하여 소섯개, 봉안이개, 산 것개,앞빌레 해안을 중심으로 자연부락이 생겨났으며 펄이 있는 포구 주변에 산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폴개'라 칭했다. 성씨로는 경주김씨, 청주한씨, 진주강씨, 동래정씨, 제주양씨 등으로 보아진다. 1414년 이조 태종 2년 탐라가 제주로 불리고 정의군 서중면이라 하여 면소재지를 의귀리에 두고 본리를 벌포리(伐浦里)라고 했고 그후 보한리로도 개칭하였다. 1902년 임인년에는 이기원,김계형이 태흥리로 개명하였고 1925년 태흥 1,2,3구로 분리시켰다가 1952년 태흥리로 합리(合里)시켜 생활하였으나 마을이 커지고 생활권이 달라짐에 따라 행정구역도 1955년 태흥 1,2,3리로 분리되었으나 1960년 8월 1일 또다시 태흥 1,2,3리로 분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태흥2리 홈페이지 바로가기

 

태흥 3리

약 500여년 전(1494-1506) 태흥리 110번지 부근은 안지왓 집터라 불리면서 안씨, 강씨, 장씨가 살았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200여년 전 태흥리 8번지 부근에 현씨, 김씨, 정씨, 강씨가 살면서 인가가 형성되어 그 곳 이름을 산변포(산것)라 칭하였다 1860년경 태흥리 36번지 일대에 오씨, 김씨, 고씨, 송씨, 강씨가 정착하면서 덕돌포(덕개)라 칭하였고 1915년 의귀리에서 정의군 참사 김희은씨가 태흥리 165번지에 정착하고 같은 시기에 이주민들이 들어 오면서 부락을 형성 삼석골(삼석동)이라 하였다 1913년 삼석동, 덕돌포, 산변포를 합하여 삼덕동이라 칭하여 불리어 오던중 1948년 4.3사건으로 주민이 피난하여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덕돌포를(덕둑개)에 살고 있는 가구만 남았었다. 1949-1951년까지 삼석동, 입석천, 덕돌포를 중심으로 성(일명:만리성)을 축성하고 성안에 경찰출장소가 들어서면서 지역 안정을 통한 마을구성이 되기 시작하여 1961.8.1일 태흥 1.2.3리로 행정구역이 분리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음.

 

태흥3리 홈페이지 바로가기

 

위미리 : 위미1리, 위미2리, 위미3리

위미 1리

위미리에 언제부터 사람이 들어와 살기 시작하였는가에 대한 사실은 그것을 입증할 만한 사료가 발견되지 않아 그 정확한 연대를 밝혀내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비교적 객관성을 갖는다고 인정되는 구전자료에 의하여 설 촌의 역사를 추정하고, 그 이후는 가문별 위미 입도 선묘의 비문과 족보 등을 통하여 위미리 설촌의 역사를 밝혔다. 위미리에 처음 들어와 살았던 사람은 지금부터 약400년 전 고좌수였다. 고좌수는 상위미의 속칭 '큰 터왓'에 터를 정해 살았는데 현재 이곳에는 당시의 사실을 입증하는 유물들이 많이 출토되고 있다.(오조리터의 토기와 유기 그릇의 파편들이 그것이다.) 그러나 고좌수의 후손들은 '좃벤 골총'의 전설에서 나오는 것처럼 절손되어 버림으로써 현재 위미리와는 혈연적 유대를 갖지 못하고 있다. 이어서 성씨가 현재 위미교회 서북쪽의 속칭 '신세기 모루'에 살았으며(그의 후손인 성대씨는 마을의 노인도 기억하고 있었는데 '동쪽'으로 이주를 해버렸다고 한다.) 셋뙤미에는 좌수가 살았다. 또한 '안가름'에는 허씨와 홍씨, 강씨가 살았다.(그들이 살았던 터는 '한비장통', '홍비장터', '강의방터'라는 지명으로 지금도 남아 있다.) 그러나 역시 이들도 그후 다른 마을로 떠났거나 절손됨으로써 현재 위미리와의 혈연적 관계를 인정할 수 없다. 따라서 위미리에 정착하여 그 뿌리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사람들은 약350년 전 위미 2리의 군위오씨(軍威吳氏), 그리고 위미 1리 연안김씨(延安金氏)의 사위가 되어 정착한 고씨가 위미리에 처음으로 터를 정한 사람들이다. 연주 현씨도 이때를 전후해서 위미리에 터를 잡았다.

 

위미1리 홈페이지 바로가기

 

위미 2리

설촌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맨처음 함씨가 속칭『신세기 모루』인근에 정착하여 한씨, 홍씨와 촌락을 이루고 살았으며 당초 명칭은 '우미'라 하였다. 1416년 (태종 16년) '우미'에서 '뙤미'라 불렸다. 1915년 제주도제 실시로 '뙤미'는 '위미리'로 개칭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위미2리 홈페이지 바로가기

 

위미 3리

1833년 위미리 374번지에 고영훈씨가 정착 설촌하여 동쪽으로 연디뱅디, 서쪽으로 팽도루마루, 남쪽으로 오로콤(굴), 북쪽으로 알종정굴 사이에 30호 가량이 모여 부락을 형성하였으나 4.3 사건으로 전가구가 전소되고 6.25 전쟁이 끝나면서 흩어졌던 토착민들이 전거주지와 농경지를 찾아 한가구씩 모이기 시작하면서 '종정동'이라는 마을을 형성하게 되었다..

1989년 4월 6일 위미 2리 종정동에서 위미 3리로 행정구역을 변경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위미3리 홈페이지 바로가기

 

하례리 : 하례1리, 하례2리

하례 1리

우리 마을 설촌 후 오늘에 이르기 까지의 연혁을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고려충렬왕 26년(1300년) 탐라를 동서도현(東西道縣)으로 설치할 때 14현중 1현인 호촌현(狐村縣)으로 되었다.
조선 태종 16년(1416년) 정의현과 대정현을 둘때 호촌현은 없어지고 정의현 호촌으로 존속 전라도 제주목 정의현 호촌이 되었다.
광해군 원년(1609년) 정의현에 3면 (중면, 동면, 서면)을 두니 하례리는 중면에 속했다. 영조때(1730년경) 동중면(東中面)과 서중면(西中面)으로 개편됨에 하례리는 서중면에 속했다.
영조 25년(1750년) 대표 칠호(七戶)가 모여 새로운 마을 '오지리(烏旨里)'를 탄생시켰다.
순조13년(1813년) 오지리(烏旨里)를 오지리(梧旨里)로 변경행정상 독립된마을이 되었다.
1875년경 오지리(梧旨里)가 하례촌(下禮村)으로 변경되었다.
1906년 지방행정구역이 개편되어 제주, 정의, 대정 3군(郡)으로 정립되었다.
1910년 한일합방 당시 정의군에는 좌면, 우면, 서중면, 동중면으로 되어 있었는데, 1914년 조선총독부령 제111조에 따라 정의군에 좌면을 정의면으로 개칭되고 하례 촌은 하례리로 개칭되었다.
1935년 행정구역 명칭의 변경조치에 따라 좌면은 서귀면, 서중면은 남원면, 동중면은 표선면, 정의면은 성산면으로 변경되므로 하례리는 제주도 정의군 남원면 하례리가 되었다.
1946년 8월 1일 제주도제가 실시되므로 제주도 남제주군 남원면 하례리가 되었다.
1960년 행정단위 마을로 하례리를 하례1리와 하례2리로 구분하였다.

 

하례1리 홈페이지 바로가기

 

하례 2리

한라산 줄기 뻗은 두서악과 녹근시의 정기아래 서쪽은 영천오름, 남서쪽에 칡오름 두악의 기슭을 흐르는 효돈천 상류에서 서귀포시와 남원읍의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고려말기에 목마장을 설치하였으며, 조선 세종때는 목마구소장에 속하였으며, 마필을 점검하는 점마소가 있었고, 속칭 고살리에서는 맑은샘을 생활용수로 사용하였고, '직사'라고 하였다. 지금부터 약 200여년 전에 이 효돈천 상류의 동안과 북변에 속칭 금물과원(재래종 귤을 재배하였다는 설)이라는 곳에 제주현에서 건너온 남양홍씨가 주막(여관)을 경영, 대정현과 정의현을 왕래하는 중간지점으로 교통의 요충지이기도 하였다. 그후 고씨가 두서악 기슭에, 또 현씨 문씨등이 이주하여 30여 세대가 화전을 일구며 옹기종기 살면서 학림동이라 불리웠으며, 4.3사건으로 인하여 하례1리와 효돈지구등 해안부락에 흩어져 살다가 1962년 정부의 시책사업으로 부락을 재건함으로써 40여세대가 입주, 황무지를 개간하여 살기 시작하여 1965년 4월에 하례2리 행정동으로 분리 되었다. 1967년 고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의하여 제주도 중산간 지대 개발사업의 일환으로 4.3복구 주택, 북쪽 광활한 목야지에 양마시범단지 조성목적으로 1967년 10세대, 1968년도에 23세대의 주택을 건립(1970년) 입주하여 하례 2리에 편입되었으며, 그후 정부시책의 변경으로 공업원료단지, 감귤단지로 변경되었다. 본리는 감귤재배적지로 인정되어 자연이주자들이 많이 건너와 지금은 200여 세대 800여 주민들이 평화로운 삶을 영위하고 있다.

 

하례2리 홈페이지 바로가기

 

신례리 : 신례1리, 신례2리

신례 1리

옛날부터 집단촌락을 형성하는데 지형과 지세가 좋고 식수,기후,풍토,농경지등 진취성 있고, 생활조건의 호적한 곳을 골랐었다. 신례리의 위치를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보면 뒤로는 이승악이 든든히 자리해 있고, 마가미 줄기가 용이 꿈틀거리는 모습으로 이어지며 좌측으로는 성길악이 마을을 감싸듯이 위치해 있고 우측으로는 갈악산(칠오름)과 영천악이 지켜보는 안으로 수려한 하천이 있어 장관을 이루었으며 앞은 지귀도 너머로 큰 희망을 안겨주는 태평양의 대해를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우리의 선인들은 정착했음을 알 수 있다. 촌락의 형성은 구전에 의하면 지금부터 1000년 전인 고려 태조때 성. 문. 조 삼성이 설촌하여 호촌(狐村)이라 이름하고 살았다는 설이 있으며 현재의 지명으로는 「성구성이왓」(1002번지경) 「문세운의 터」(1005번지경) 「조조기 돌래」(992번지경)등 지명이 내려오고 있다. 신례리가 호촌으로 부르게 된 배경으로 현촌의 설치에 대하여 고찰해 보면 제주도 지상권비 현촌은 고려조의 말단행정 단위로서 숙종 10년 서기 1005년 려연에서는 탐라국이 군으로 개편되어 고려국의 일군으로 탐라군이 되었고 그후 18대 의종 7년 서기 1153년에는 군이 다시 현으로 개편되고 현련제가 실시되었으며, 고려 21대 희종 때에는 전도내에 14현을 두어 다스렸으니 그 현촌명은 귀일, 고내, 곽지, 귀덕, 명월, 신촌, 함덕, 김녕은 산북이고, 토산, 호촌, 홍로, 예래 및 차귀, 고산 등은 산남지역이고, 호촌 현청의 위치는 현재의 신례1리이며「예촌(禮村)」이라 촌명한 것은「예촌망(禮村望)」의 「여우」와 비슷한 데서 기인한 것으로 보며 옛날의 촌명은 동물의 이름 "여우"자를 따서 촌명했음을 역시 동물의 이름을 딴것으로써 공통성을 지니고 있다. 그후 이조 태종 16년 서기 1415년 정의군 설치에 따라 서중면 예촌(禮村)으로 불리운 것은 예조부터 예절바르고 양순한 사람들의 모여지는 양촌(良村)이라 하며 예촌을 지명하였다가 서기 1915년 제주도제 실시에 의하여 신례리(新禮里)로 개칭되었다. 당시 신례리는 정의군 소재지인 성읍리로 부터 가시리, 토산리, 신흥리, 의귀리(서중면 소재지)한남리를 경우 우면으로 이어지는 교통상 중심지에 위치하였던 것이며 그후 신례리는 현 중산간도로를 분계선으로 하여 북은 일구라하고 남은현 신례 2리 포함 2주로 나누어졌다가 서기 1949년 9월 1일 도제 실시에 따라 현재의 구역대로 확정되었다.

 

신례1리 홈페이지 바로가기

 

신례 2리

공천포(公泉浦)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는지, 이에 대한 기록이나 확실한 증거는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비교적 객관성을 갖고 있다고 인정되는 구전자료(口傳資料)와 족보(族譜), 호적(戶籍) 등을 참고하여 설촌 과정을 추측해 보고자 한다. 우리마을에 처음으로 사람이 들어와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 형태를 형성한 시기는 지금으로 부터 약 120여년 전인 1873년 (고종 10年) 조선조(朝鮮朝) 말엽(末葉)인 것으로 추정된다. 공천포에 제일 먼저 들어와 살기 시작한 사람은 해남 윤씨(海南尹氏)의 시조 윤재부(尹在富) 공(公)의 22세손(世孫)인 윤성표(尹聖表)공이다. 윤성표 공의 아버지 윤인호(尹仁好) 공은 전라남도 해남(海南)에 살다가 지금으로 부터 160여년 전에 제주도에 유배되어 지금의 조천읍(朝天邑), 속칭(俗稱) 동백동이란 곳에 자리를 잡고 살았으며, 이곳에서 윤성표와 윤성로 형제를 낳았다. 그 후 윤성표는 구성녀(具成女)라는 여자와 결혼하여 살다가, 1870년(고종 7年)경 부친(父親)이 사망하자 윤성표는 처를 데리고 살기좋은 곳을 찾아 산남(山南)쪽으로 길을 떠나 여러 곳을 돌아다니다가 우리 마을에 도착한 것이 1873년 경인 것이다. 바다와 인접해 있는 곳에 넓은 모래판이 펼쳐있고, 그 중간 중간에서 생수(生水)가 용출(湧出)하므로, 식수에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판단하여 정착하면서 골창물 옆(지금의 리사무소 부근)에 움막을 짓고 고기잡이와 농사를 지으며 살기 시작하였다. 윤씨의 뒤를 이어 하례리(下禮里)에서 제주 양씨(濟州梁氏), 위미리(爲美里)에서 연안 김씨(延安金氏) 등이 들어와 살게 되면서 차차 촌락(村落)의 형태를 이루어 공천포라는 마을이 형성되었고, 행정적으로는 예촌(禮村)과 합병(合倂)되어 운영 되다가 1915년 제주도사제(濟州島司制)가 실시되면서 예촌은 신례리로 개칭되었다. 그 후 신례리는 지금의 중산간 도로를 분계선(分界線)으로 하여 북쪽은 1구(區), 남쪽은 2구로 분할하게 되었는데, 이때 2구에는 공천포(公泉浦), 부전동(釜田洞), 상방동(上方洞), 그리고 종남동(宗南洞)이 포함되었다. 당시의 가구 수(家口數)는 1구가 170∼180호(戶)였고 2구는 120여호가 되었다. (공천포56호,부전동34호,상방동16호, 종남동13호) 1949년 9월 1일 도제개편(道制改編)에 따라 지금의 변전소(變電所) 뒷길, 즉 상방터와 종남골을 잇는 도로를 기준으로 하여 북쪽은 신례 1리, 남쪽은 신례 2리로 확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우리 마을이 설촌된 시기는 불과 120여 년 밖에 안되지만, 문헌(文獻)기록을 참조하고 지명(地名)으로 전해지는 이야기와 기타 유물(遺物)등을 참고하여 보면, 이보다 훨씬 전인 700여 년 전과 2000여 전에도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신례2리 홈페이지 바로가기

 

한남리

약 1290년경(고려 충렬왕 16년) 석곡리(石谷里)라는 이름으로 설촌되어 불리어왔으며 고려말기 1369년(공민왕 18년)에 진무(鎭撫, 허진무, 장진무)라는 관직을 가졌던 분이 살았던 집터가 구전에 의해 내려오고 있다. 그 후 조씨(조필지)가 허씨 집안에 사위로 들어와 살았다는 구전이 있는데 그 집터에는 족대나무가 무성히 자라고 있다. 서기 1415년(조선 태종 16년)에 화등촌(火等村,불등개)이라 불리웠고 1630년경 현득호(득호, 1610년생)가 조씨 댁에 데릴사위로 들어와 거주하였다. 1735년경 오경창(경창,1718년생)이 현씨 집안으로 들어와 처가살이를 하였고 1752년경 고일첨(일첨,1746년생)이 현씨 어머니를 따라 한남리로 이주하였으며 그 후 문씨, 송씨, 장씨, 최씨, 김씨 등이 정착하였고 현씨, 오씨, 고씨가 많이 살고 있어 삼성촌이라 부르고 있다.1864년(고종 2년) 서중면 한남리로 개칭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1948. 4. 3사건으로 인하여 마을이 폐동되어 남원(17호), 의귀리(25호) 등 각 지역에서 살다가 1953년 7월 1일 마을이 재건되므로 다시 복귀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음

 

한남리 홈페이지 바로가기

 

수망리

이 마을의 설촌 유래는 확실한 고증은 없으나 구전에 의하면 지금부터 약 530년 전에 경주김씨가 이 부락의 속칭「동백나무밭」에 정착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이것을 입증 할 만한 것으로는 처음 정착한 곳으로 알려진 「동백나무밭」에서 지금도 옛날 기와조각 등이 발견되고 있어,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있으며, 수망리 설촌의 근거지로 보고 있는데 왜 수망리로 마을 이름을 정했느냐는 아무도 모르고 있어, 확실하게 대답을 못하고 있다. 수망리는 처음에는「물우라마을」(물을 위한다는 뜻)이라고 불러지다가 1915년 서중면(西中面)에 예속되면서 마을 이름이 수영악의 水자를 따서 수망리(水望里)로 개칭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는데, 높은 지대에 위치해 있어 전망이 좋다는 이유로 수망리라 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견해가 많다. 또 어떤 이는 수영악이 용줄기를 타고 설촌 되었다고 하여 수망리라 불린다고도 한다.

 

수망리 홈페이지 바로가기

 

의귀리

의귀리의 설촌유래는 '호종달 설화'와 함께 전해진다. 수망리와 한남리의 경계인 '반드기왓'에서 호졸당과 연을 맺게 되는데 휘보의 아들인 이홍이 1600년경 호종달이 정해준 집터에 집을 지어 이주하니 이것이 촌락의 시초가 되었다 한다. 본 조사자들이 경주김씨 댁에서 확인해 본 결과 그 족보에 '이홍할 아버지가 수망리 남편 삼리허에 설동하여'라고 적혀 있었다. 경주김씨가 아닌 다른 집안에서는 이러한 설촌유래에 의심을 하여 그 전부터 촌락이 형성됐을 것이라고 보고 있기도 하나, 그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이야기나 기록은 전혀 전해지지 않고 있다. 비교적 가구 수가 많은 오씨, 고씨, 광산김씨 등이 마을에 들어 온 것은 1700년대 이후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오씨는 200여 년 전 처음 입동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양씨는 약 250년 전 예촌(신예리)에서, 광산김씨는 약 300년 전, 고씨는 300여 년 전 제주시에서 현씨는 약 200년 전 경에 수망리 등지에서 의귀리에 들어오게 됐다고 한다. 김, 오, 양, 고, 현씨 외에 나머지 성씨들이 의귀리에 살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라 한다.

 

  • 감목관 경주김씨
    이홍의 아들이자 경주김씨 입도조인 김검용의 7세손인 김만일(1550-1632)은 의귀리만이 아니라 제주의 경주김씨 가문을 증흥시켜 후손들의 추앙을 받고 있으며 많은 일화를 남겼다. 일찍 무과에 오른 김만일은 선조 15년(1582) 순천부에 있는 방답진 검제절사가 되어 벼슬을 지내고 고향에 돌아온 뒤에는 목축 사업에 뜻을 두어 선대로부터 내려온 마축개량번식에 전념하는 등 생업에 힘썼다. 그 무렵 필마(匹馬)의 용역은 전마(戰馬)·체신(遞信) 뿐만 아니라 승마(乘馬) 등으로 국가적인 비중이 컸으므로 그는 특히 육마(育馬)에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게 됐다. 김만일의 이러한 노력은 날로 그 열매를 맺어 입도 후 침체 속에 빠져 있던 집안을 크게 일으키며 더욱 육마 사업이 번창하던 중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전란으로 말미암아 국력은 극도로 쇠약해 졌고 민생은 도탄에 빠져 각지에서 굶어죽는 백성이 속출하는 등 국난의 여파는 엄청났다. 수축(獸畜)은 굶주린 백성에 포살(捕殺)되어 필마 등 운송수단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게 됐다. 이러한 참상을 딛고 조정에서는 전후복구와 민생구휼을 위해 마정(馬政)의 진흥을 도모하는데 전력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사정과 마육에 성공한 김만일의 명성은 당시 사간원에서 올린 "전마충당이 막급한 바 전하는 바에 의하면 제주에 가계만금의 당신 김만일이 있어 사마가 반식부지하여 기수 불지계산하므로 마필을 진상토록 하사이다."라는 계장에 잘 드러나 있다. 이에 조정에서는 마필 진상을 요청하게 됐고, 김만일이 조정의 요청을 받아들여 양마 5백필을 헌상한 것은 선조 33년(1600) 경자년의 일이었다. 조정에서는 그의 공적을 높이 사 초공으로 우대하여 그해에 선조가 직접 소견(召見)한 자리에서 가선대부 오위군총부총관에 금위중질이라는 높은 벼슬을 내렸다. 얼마 후 김만일은 자헌대부동지추부사에 제수되고 광해군 13년(1621)에는 다시 자헌대부에 중작 되었으며 또 인조 6년(1629)에는 종일품 숭정대부를 제수하게 되어 제주출신으로 최대의 영예를 누리고 그 명성이 경향에 떨쳤다. 그가 83세로 천수를 마친 것은 인조 10년(1632) 10월이었다. 별세하기 전 김만일은 가문이 귀한 것을 뼈아프게 여겨 조정에 입도선조(김검용)의 유덕을 밝혀주도록 요청하여 훈련원군감을 추증하게 되었다. 별세후 그는 남원읍 의귀리 1773번지 '서위남루'에 묻혔는데 조정에서는 의귀리 종묘에 봉사케 하였다. 그런데 김만일의 갑작스러운 높은 관작 제수는 선조에서 광해군을 거쳐 인조조에 이르는 동안 경향의 토로들과 관리배들의 시기의 대상이 되어 시한부에서는 "김만일은 육마천승 가루만금의 해중구민에 불과한데 병부상등 위임막중한 총관직을 제수함은 부당하니 환수성명하고 김백미포로 상하심이 가하이다"하고 계하였으나 임금은 이를 무시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그의 큰 아들 김대명은 수령을 제수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공을 세워 보성군수(현지에 선정비가 있다 함)가 됐으며 둘째아들 김대성은 승당상이 되었다. 한편 효종 10년(1659)에 이르러 김만일의 큰 손자인 여와 아들 대길이 다시 양마 2백필을 나라에 바쳐 그 유덕을 이었다. 이때 목사 이증은 그 공로를 가리기 위하여 종문세습직으로 감목관직을 특설하여 주도록 조정에 품신하고 왕의 윤허를 얻어 상장감목관을 두게 되니 이것이 감목관의 시초가 되었고, 초대감목관에는 김대길이 임명되었다. 이후 이 관직은 경주김씨 종문에서 계승되어 오다가 숙종 28년(1703), 입도 11세손인 김진혁(金振赫)이 감목관 때에 그 직이 혁파되어 중단되었다. 그러나 숙종 43년(1717)에 이르러 13세손 김세태(金世兌)가 그 아우 세화(世華)를 서울로 보내어 수차 탄원하고 상소한 끝에 경종 원년(1721)에 다시 복구되어 감목관직은 20년 만에 환직되었다. 그후 고종 29년(1892)에 감목관으로 피선된 17세손 김경치(金暻治)가 재직시인 고종 32년(1895) 봄 종문(宗門)의 청원에 의하여 그 직제가 폐지되었다. 임기 5년인 감목관은 제주목사와 경주김씨 도종손(都宗孫) 및 시직관(視職官) 3인의 공동 천거로 후계자를 선임한 후 조정에 품신하여 왕의 윤허를 얻게 되어 있었는데, 녹곡(綠穀)이 있었음이 분명하고 직급은 종삼품(從三品) 대우를 받은 것으로 알려진다. 이와 같이 국난과 백성의 어려움이 생길 때마다 대대로 충효와 절의에 힘쓰니 조정에서도 이를 알고 그 공을 높이 여기어 1752년 영조임금으로부터 옷 1습(특사 표량 일습)을 하사받았다. 이에 사의(賜衣)를 받은 마을이라 하여 '옷귀'라 부르니 '의귀리(衣貴里)라는 마을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의귀리는 예로부터 경주김씨의 세도가 대단했던 듯하다. 마을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경주김씨에서 행해지는 굿의 형식도 다른 가문과는 차이가 나는데, 이를테면 무당의 사설에 경주김씨 집안의 내력이 전부 설명되고, 다른 집안에서는 '큰대'를 한 개만 꽂는데 비해 경주김씨는 3죽을 세웠다고 한다. 의귀리가 이 지역의 중심지이며 마을의 세력이 컸음은 지금도 남원 2리를 '서옷귀(西衣貴)'라고 부르는 데서도 나타난다.

 

신흥리 : 신흥1리, 신흥2리

신흥 1리

해안변을 낀 마을로서 보말동과 방구동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졌으며 최초로 주민이 정착하였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으나 1780년경에 이씨가 방구동 (신흥리 349번지)에 거주하다가 그후손이 없어 혈연적 유래는 없고 1791년 표선면 토산리에서 경주김씨가 방구동으로 넘어와 살기시작하면서 본격적인 마을형성이 되었으며 보말동에는 1835년 속칭 슬디란곳에 김신창씨라는분이 기거하게 되면서 보말동이란 부락이 형성되었다. 본래 정의군 서중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온천리, 동의리 일부와 동중면 안좌리, 토산리의 일부를 병합하여 "새로 일어나라"는 뜻으로 신흥리라 하여 제주군에 편입되었다가 1935년 남원면에 편입 1946년 남제주군에 편입되었다

 

신흥1리 홈페이지 바로가기

 

신흥 2리

이조 태종 16년(서기 1614년) 제주목이, 제주, 정의, 대정등 3개의 지방행정으로 분리된 후 숙종 7년(서기 1681년)에 광산김씨(光山金氏) 입도시조(入島始祖) 십이세손(十二世孫) 사형제 중 막내인 명환(鳴煥)님이 현재 표선면 토산 1리에서 본리 1599의 1번지로 전입하여 정착하게 되었다. 당시부터 '여온내'라 불렀으나 그 후 약 5년뒤 셋째인 명휘(鳴輝)님이 1599의 1번지로 입주하여 택호를 '동집'이라 불렀고 명환님은 1715번지로 입주 정착하여 택호를 '웃동집'이라 불렀다. 명환(鳴煥)님은 처첩(妻妾)을 두어 무남삼녀를 두고 오은능님을 큰 사위로 맞이하여 택호를 '웃큰집'이라 했다. 서집에 큰집은 알큰집이며 작은 할머니 사는 집은 웃큰집에 사위가 동거생활하다가 작은 할머니가 사망하고 난 후부터 가옥과 토지, 재산 일체를 상속받아 웃큰집은 사위 오씨가문이 웃큰집이 되었다. 당시 온천리에 고수동은 표선면 토산 1리에 고수동과 수도동이 합병되었으며 설촌한 할아버지 손자도 많아졌고, 타 각 성이 전입하여 백여호가 되어 마을을 이루어가니 새로 잘되어 간다는 뜻으로 리명은 신흥리로 개칭하여서 여온내는 원동, 물도왓은 고수동에 속하고 하동, 이렇게 3개동을 두어 본리가 구성되어 정장, 이사장을 두어 행정을 취급하였다. 서기 1952년 신흥 1구,2구로 개칭하여 지내오던 중 4.3사건을 당하여 서기 1948년 11월 14일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가옥과 재산을 버리고, 남원, 태흥, 신흥하동 등지로 흩어져 생활하다가 그러나 고향을 버릴 수 없다는 뜻으로 그 당시 리장 김봉관, 김희찬, 정진선, 김승삼씨가 1차 복구운동에 앞장섰다. 1년 후 복구하여 속칭 동집을 중심으로 성을 쌓아 당시 약 60호가 입주하였다. 그러나, 한라산 좌익폭도들이 주야로 부락을 침입하여 마을 주민들은 일상생활이 공포에 떨어 할 수 없이 해안부락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그 후 1950년 2차 복구하여 성안이 협소함으로 북쪽으로 확장하여 약 70호 정도 입주하여 경찰파견소(지금 리사무소)를 두고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경계근무(보초근무)에 임하였다. 남문, 북문, 동문, 서문 등 9개 초소를 설치하여 운영했으며, 이런 사건속에 근무중 1950년 음력 1월 15일 심야에 폭도 수십명이 성내를 침입함으로 박원국 순경을 선두로 부락 협조원 대항 격투중 불행하게도 김영흥, 김두흥, 김상창, 김자윤, 김창숙, 오성언등이 순직하였고 재산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서기 1961년 신흥 1리, 2리로 개칭 분리되어 행정취급을 따로 하게 되었으며, 설촌이래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신흥2리 홈페이지 바로가기

담당부서
남원읍>주민자치과>주민자치
담당자
강병국
연락처
064-760-4114
Q. 현재 페이지에서 제공되는 서비스에 대하여 만족하십니까?
만족도 조사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