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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시 대륜동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우리 대륜동 앞에는 태평양의 넓은 바다가 있고 그 앞에 그림처럼 보기좋게 우뚝선 범섬과 뒤에는 마을을 마치 둥우리 안에 포근히 감싸줌을 받는 듯한 느낌이 드는 곳입니다. 뿐만 아니라 물을 찾아 삶의 터를 헤매던 옛 조상들에게 맑고 시원한 물을 제공해 주는 샘물이 이곳 저곳 철철 넘쳐 흐르는 곳입니다.
  • 최남단 마라도에서 남원읍 지귀도까지 제주바다의 1/4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고근산이 우뚝 솟아 있습니다. 해안가 일주도로 변에는 시설원예 주단지가 펼쳐지고, 해안선을 따라 절경이 장관을 이루는 곳으로 숙박과 관광을 함께 즐길 수 있는 마을입니다.
  • 우리동은 민원인에게 친절하고 신속하며 공정 정확하게 민원 처리를 하겠습니다.

 

법환마을

법환마을

 

마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1545년(명종 원년)으로 을사사화에 피해를 입게된 선비중 현(玄)씨가 난세를 피하여 제주로 들어와서 지금 마을의 북쪽에 위치한 속칭 <양지머리>에 집을 짓고 살기 시작한 데서 비롯되었다 한다. 그러나 이를 입증할 만한 자료는 없으며 마을 주변 옛 무덤의 비들은 대개 9∼13대를 나타내고 있어 설촌이 350년 전쯤에 이뤄졌을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다른 한 가지 설은 지금의 마을 서남쪽인 <큰가름>에 현(玄)씨, 허(許)씨, 한(韓)씨 등 세 성씨가 의형제를 맺고 살았는데 어떤 이유로 헤어져 현씨는 지금의 법환리로 허씨는 호근리로, 한씨는 <통물>을 거쳐 보목리로 이주하여 살게 됐다는 설이다.
이 설을 뒷받침이라도 하듯 이들 성씨간에는 아직도 서로간에 혼인을 꺼리는 경향이 있다. 1601년(선조 34년)에 김상헌이 펴낸 남사록(南槎錄)에 의하면 당시 배를 댈 수 있는 포구로 12처가 있는데 그 중에 현(縣) 서쪽 67리에 법환포가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이 이름은 그보다 전부터 쓰여 왔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당초 1416년 안무사 오식이 정의, 대정현을 나눌 때 대정에 소속되었다가 1609년(광해군 원년) 판관 김치가 동서방리(東西坊里)를 설치할 때 수차례 진정에 의해 정의현에 소속케 되었으므로 <법환(法還)>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설에는 차질이 있다.
이 마을 앞의 범섬은 고려 공민왕 23년(1374) 삼별초의 참패 이후 100년 가까이 이 고장을 지배해왔던 목호들이 최영 장군의 군사에 의해 섬멸된 곳이다. 최영 장군은 전함 314척과 군병 2만 5,600명을 거느리고 이 해 8월 28일 명월포(明月浦)로 상륙하여 3,000명의 기마병으로 강력히 저항하는 목호들을 격파한 후 잔적들을 쫓아 범섬까지 가서 모두 섬멸하였다. 이로써 목호는 제주에서 완전 섬멸되었는데 이 사건과 연관된 지명인 듯 지금도 이 마을 바닷가에는 <막숙(幕宿)>, <군성(軍城)이> 등으로 불리는 지명이 있으며 배를 줄줄이 잇대어 다리를 놓고 군사들을 범섬까지 진격케 했었다는 기초인 <뱀줄이>도 있다.

 

호근,서호마을

호근 서호마을

 

이 마을에 처음 사람이 살았던 곳은 西好里와 法還里 사이 <큰가름>이었다고 전한다. 속칭 <통물>머리에 서호리 마을의 지번 1번지가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여기도 초기에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당시는 집단부락을 이룬 것은 아니며, 큰가름, 통물 외에도 이 마을 인근의 <원통>, <과원>, <너분터> 등지에 2∼3호, 5∼6호씩이 흩어져 살았으며 주변은 아름드리 숲이었다고 전해온다. 이 마을 출신 許垠이 1927년에 쓴 <好近錄>에 의하면 '이 마을은 趙씨 韓씨가 창설한 곳이다. 거금 300년 경에 혹은 처가살이로, 혹은 지경을 선택하여 와서 살면서 마을의 이름을 <好近磊里>라 불렀으니 그것은 머들(돌무더기)이 높은 까닭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 후 100년쯤에 <磊>자가 빠지고 <好近里>로 변했다는 것이다. 이 책에는 또 서호리 웃동네 許씨 집터에 고려말 정당문학을 지낸 趙元이 바다를 건너와 조선조 개국 3년(1394) 갑술년에 여기 터를 잡았으며 그 후 8세에 망하니 陽川許씨가 장가들어 그 터에 살았다고 쓰고 있다. 이 후 淸州韓씨가 들어와 살았었다고 하나 그 후예는 없으며 이 한씨 집에 사위로 軍威吳씨가 들어와 지금까지도 살고 있다. 이 마을에서는 1707년(康熙 46년 丁亥) 3월에 遮日帳계가 조직되어 현재까지도 연면히 이어 내려오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280여년 전인 이 해에 차일장에 입참했던 사람은 모두 51명으로 이름 수가 많은 성씨 별로 열거하면 金씨 17명, 高씨 8명, 許씨 6명, 吳씨·玄씨 각 5명, 康씨 3명, 韓씨 2명, 肖씨, 奴씨, 洪씨, 李씨, 宋씨 각 1명씩의 분포이다. 당시의 기록을 미뤄 마을 사람으로서 이 계에 가입하지 않았던 사람도 다소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趙씨의 사위로 입향한 許씨는 이제 11대에 이르며, 韓씨의 사위로 蘭山里로부터 온 吳씨는 13대에 이르고 있다. 軍威吳씨는 나중에 들어와 8대째가 되는 다른 파도 있다. 역시 許씨 가에 장가들어 1680대에는 光山金씨가 들어오며, 이에 앞서 1666년에는 廷州玄씨, 1683년에는 信川康씨, 1786년대에는 慶州金씨, 1696년에는 東萊鄭씨, 같은 해에 濟州高씨, 1861년에는晋州姜씨, 1830년경 金海金씨, 全州李씨, 1860년에는 密陽朴씨, 1885년 晋州秦씨, 1890년에는 仁同張씨도 이 마을로 들어온다. 이런 성씨의 입향은 6.25 이후 현재까지도 꾸준히 이뤄지고 있다. 이후 1892년에는 씨족간 다툼으로 마을이 분리되기 시작하며 1900년 한때 합리가 되기도 하지만 1903년 다시 西好·好近里로 나뉘어 1981년 서귀포시 大倫洞의 6∼11통에 소속될 때까지 지속된다. 1903년 분리될 당시 경계는 북으로 <바가잣도>에서 <天地員>을 따라 남쪽<통물>까지 이르게 하고 마을 이름을 서호리라 했으니 당시는 호근리가 83호, 서호리가 113호였다. 이후 1913년 토지 측량을 할 때 천지원 경계선이 명확하지 못하다 하여 도로와 계곡을 따라 경계를 다시 정했다. 학교는 일제시대인 1930년 好西中央義塾을 마을 자체에서 설립하여 속칭 <막동산>에서 교육해오다가 1934년 西好간이학교로 설립인가 되었으며(2학년 1학급), 1943년에는 6년제 西好國立學校가 인가되었다. 이 학교는 당초 <막동산>에 있던 것을 1977년 현 위치인 <솔대왓>으로 옮겨 현재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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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환 서호 호근 새서귀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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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부서
대륜동>주민자치
담당자
김진우
연락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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