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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시 천지동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우리 천지동은 천지연, 외돌개, 삼매봉 등이 소재한 서귀포시내 서부관문 지역으로서 동쪽으로 중앙동, 서쪽으로 대륜동, 남쪽으로 정방동, 북쪽으로 서홍동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중앙로타리에서부터 초원빌딩, 나폴리호텔로 이르는 중앙로는 상가지역이고 남성리는 농업지역, 그외의 지역은 주거지역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특히 지명이 유래된 천지연폭포는 연 200만명의 관광객이 찾고 있는 제주 제일의 관광지이고 남성리 해안변은 외돌개 및 섶섬, 문섬, 범섬, 새섬과 태평양을 바라보며 호연지기를 키울 수 있는 곳입니다.

우리동은 민원인에게 친절하고 신속하며 공정 정확하게 민원 처리를 하겠습니다.

서귀마을

西歸里는 현재의 中央洞과 正房洞, 天地洞, 松山洞의 대부분을 포함하고 있던 마을로 산쪽으로 東·西烘洞을 경계로 하고 남쪽은 바다에 면해 있는 마을이다. 1961년 10월 1일 이후 서귀 1·2·3 리였던 마을이며 1981년 시제 실시까지 통칭 서귀리로 불리어왔다. 현재도 서귀포시청 등 행정기관이 몰려있고 평생교육 관련으로 운영되는 서귀포시평생학습관이 천지동 관내에 있으며 상업의 중심지로 명실공히 서귀포시의 핵심지구가 되고 있다. 이 마을은 섬의 남단에 위치하여 기온이 온난하고 물이 좋으며 천연 경치 또한 아름다워 사람 살기에 아주 좋은 조건이다. 마을의 양 옆으로는 天地淵과 正房 두 폭포를 이루고, 이 폭포수를 이루는 두 개의 시내는 마을을 감싸고 있다. 이런 마을의 <西歸浦>란 이름은 역사 이전의 전설로 거슬러 오른다. 中國 秦始皇 시절에 不死藥을 구해오라고 보낸 童男童女 중 徐市가 이곳을 지나가면서 <徐市過此>라고 正房폭포의 절벽에 새겼다는 데서 유래한다. 그러나 이 절벽에 새겼다는 <徐市過此>의 암각은 아직까지 확인이 안된 상태이다. 朝鮮시대까지 이 마을의 포구는 候風處의 구실을 했으며, 1589년(宣祖 22년)에는 烘爐川 상류에 있던 西歸鎭이 이 마을 중심(지금의 第一敎會 자리)으로 옮겨왔던 기록도 보인다. <西鎭老星>, 즉 서귀진에서 바라보는 南極 老人星, 샛별의 아름다움이 瀛州十二景의 하나가 되고 있거니와 이 성의 규모는 주위가 825척, 높이가 12척이나 되었다. 또 金尙憲의 南槎錄의 기록은 이 성 안에 客舍, 軍器庫, 射亭 등 시설물이 있었으며 1인의 助防將과 城丁軍 133명, 防軍 75명 등이 있었다고 적고 있다. 그러니까 이 시대에 이곳은 이 지역 방위의 최전방이었다 할 것이다. 마을은 이 무렵을 전후하여 설촌됐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300∼400년 전의 일이다. 현재 西歸中學校 서쪽편에 李씨가 살았던 듯 이곳을 지금도 <이개(李哥)집터>라고 부르나 그 후예들은 대를 잇지 못했다. 그 후 지금 서귀포 기상대 서녘쪽에 朴씨가 살기 시작했는데 그 후예들은 지금도 상당 가구가 이 고장에서 살고 있다. 이 무렵 서귀 동동네에도 礪山宋씨가 들어와 살기 시작했는데 이들은 이제까지 12∼13대를 살고 있다. 그러나 서귀포에는 1910년대까지만 해도 속칭 <구린새끼>에 몇 가구, 동동네와 섯동네에 몇 가구, <솔동산> 남쪽 현재의 서귀포제일교회 부근에 몇 가구 등 200여 호의 작은 마을이었으며, 주변의 논밭을 가꾸고 風船을 부려 근해어업을 하며 근근이 살아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90 여년 전까지만 해도 <솔동산>에는 610번지 일대에 6채의 민가가 있었을 뿐 주변 언덕이 온통 소나무밭이어서 지명마저 솔동산이 되었다고 여기서 살아온 한 노인은 증언하고 있다. 韓末 한때 서귀포는 <德里>라고 불렸으나 어선들이 어로작업차 나갔다가 화를 자주 당하는 것이 마을 이름 ( 德里의 '풍덩풍덩'과 관련해서)때문이라고 생각한 마을 사람들이 지금의 <西歸浦>로 고쳐 부르기 시작한 것이라 전해온다. 1915년에는 東洪里 속칭 <굴왓>에 있던 면사무소를 <솔동산>내리막 끝쪽으로 옮겼다. 이 무렵까지 현재의 제일교회 자리에는 西歸鎭이 있었으며 이 자리는 그 후 濟州島 西歸支聽시대까지 이어진다. 그 후 서귀리는 일제강점기로 접어들게 되는데, 일본인 어부들 5세대가 어장 확보를 위해서 이주하여 <내팥>(지금의 天地淵 입구 주차장 부근)에 거주하며 여기 고래공장도 세워 인근 어장으로 부터 고래를 포획해 가공하였다. 또 나중 道知事를 지낸 바 있는 이 고장 출신 康性益이 여기 일본인들과 합작으로 단추공장과 해산물 등속의 통조림공장을 시설했으며, 이와 때를 같이하여 서귀포는 급성장했다. 또 일본인들은 대전 말기에 南城里 三梅峯 앞쪽 등 벼랑에(이것은 전도 해안이 비슷하지만)굴을 파 전초기지로 삼으려 했는데 아직도 그 흔적들이 남아있다. 일제시대를 거쳐 해방 후 5·16까지 이어지는 동안 이 마을은 감귤 붐을 타고 주변의 여건 좋은 과수원들에 의해 부유해지며 70∼80년대에는 관광 붐과 파인애플, 바나나등 특용작물 재배 붐도 일어난다. 1981년 서귀포시로 개편될 때까지 30여년 간에 이 마을은 급성장하고 부유해진 셈이다.

천지동의 옛날사진,풍물/풍속,관광편의업소,자랑거리 등 다양한 정보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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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부서
천지동>주민자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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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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